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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que

2025

겹과 결,  스미는 몸

김민영 큐레이터

어떤 사물 혹은 신체는 꼭 되기의 과정 안에 놓여있는 것 같다. 그것은 언제나 자라거나 사라지는 중에 있으며, 잠시의 안정 속에서도 계속해서 흔들린다. 바람에 스치는 천처럼,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숨처럼 그저 잠시 머무를 뿐이다. 형태란 지속되는 운동의 한 단면일 뿐이고 외부와 내부는 기실 영원히 연동되어 요동친다. 그렇게 닫힘과 열림의 반복 속에서 물질과 세계는 부드럽게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부드러움이란 모든 존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오래된 기술이자 서로가 서로를 감싸 안도록 하는 다정한 힘인 듯하다. 그것은 파괴를 거치지 않고도 변형을 가능하게 하며, 사물과 몸, 언어와 비언어의 경계를 녹여내기에.

 

박소은의 개인전 《겹과 결》은 되기의 과정에 놓인 흙이라는 물성을 여성의 정체성에 유비하며 견고함과 부드러움의 층위를 함께 포갠다. 흙은 언제나 거대하고 단단하면서도 늘 유연하게 현전해왔다. 흙의 이러한 속성은 작가에게 있어 여성에 대한 상징으로 다가왔으며, 작업의 주요한 재료로 선택한 계기가 되었다. 스스로의 형태를 흐리며 환경에 따라 무한히 변형되는 몸. 그 몸은 존재를 지탱하기보다 수용하고 합성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접촉한다. 그리고 접촉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진동은 겹을 만들고, 그 겹을 따라 흐르는 결을 형성한다. 따라서 전시의 조형은 겹과 결이 부딪히는 여정에서 창발된 일시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조형에서 주목할 지점은 축을 가진 단일한 형태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겹이 붙어있는 신체, 혹은 다수의 결로 갈라진 기관으로 난립한다. 그것은 남성적 조각이 추구해온 중심적·자족적 형태로부터 이탈한다. 박소은의 조각은 관계 속에서 전이적으로 형성되는 여성적 조형에 대한 선언처럼 느껴진다.

 

조금만 살펴보면,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서로를 감싸며 이루는 이접을 여성적 생존으로 받아들이는 작가의 조형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만든 도자로 된 신체 이미지는 뼈의 연결로 보이지만 큰 외연은 살처럼 흐르고 있다. 또한 완성된 표면 이전에는 말랑한 흙과 손이 있었다. 흙은 불에 구워지며 견고한 형상을 얻지만, 소성 이전의 점토 상태일 때는 손끝에서 눌리고 늘어나며 자신의 경계를 잊는다. 그리하여 흙은 몸의 제스처를 내포하는 사물로 드러난다. 박소은의 흙으로 빚은 사물들은 되기의 과정에서의 흔들림을 안고 있다. 뼈와 살이 뒤집힌 기이한 몸, 경화되기 전의 연약한 상태의 흙, 이 모순적 감각이 그의 작업을 지속시킨다. 사실 “고정되고 단단한 것에 대한 신뢰를 의심하고, 부드러운 것의 가능성을 믿는다.”고 이야기한 작가의 말을 곱씹어보면 작업 속 이질적 성질 혹은 힘의 양립은 당연해 보인다. 뼈는 몸의 중심을 세우지만, 그것을 감싸고 보호하는 것은 살이다. 강함은 회복될 수 있는 탄성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 상호보완성을 흙의 성질로 읽으며, 이를 이용해 여성성을 단단함과 부드러움, 중심과 주변이 서로 침범하는 혼종적 몸으로 번역한다.

 

이러한 감각은 여성기와 척추의 형상을 교차시킨 설치작업 〈one dance〉에서 구체화된다. 척추는 일반적으로 몸을 지탱하는 중심이자, 체계를 상징하는 근간이다. 그러나 박소은은 이를 단단한 구조로 인식하지 않는다. 작가는 뼛조각을 예민하고 부드러운 살결인 여성기의 형태로 치환하며, 서있는 척추를 구부러지고 꿈틀거리는 괴생명체로 되돌린다. 여성기로 이뤄진 뼛조각 사이에는 흙으로 빚어진 살점이 연결되고, 그 틈에서 솟아난 머리카락은 유기적인 흐름을 만든다. 그리고 뼈와 살이 얽힌 형상은 천장으로 솟구치며 다른 생명으로 변이한다. 이 기이한 조각은 척추이자 촉수, 유기체이자 SF적 신체로 읽힌다. 해체와 조립이 가능한 그것은 계속해서 무너지고 또 태어나며,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은 지속적으로 중첩된다. 뼈와 살의 관계가 전도되는 지점에서, 신체는 기관 없고 흐름과 감각으로만 이루어진 유기적 몸1)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한편, 박소은의 이상한 몸들은 하나의 형태로 수렴되지 않는다. 〈2 of Everything〉에서 작가는 여성을 지칭하는 명사들을 수집하고 그것들을 이중의 형상으로 겹친다. 우유와 쿠키는 영미권에서 여성의 가슴과 성기를 지칭하고, 향로(香爐)는 중국어에서 난잡한 여성을 일컫는다. 그는 여성을 속칭하는 저급한 단어들의 형태를 이중화함으로써, 여성을 향한 언어적 폭력을 반향시키는 동시에 여성 정체성이 언제나 둘 이상의 층위에서 생성되어왔음을 이야기한다. 박소은의 형상들은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가 말한 ‘두 입술’2)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분리되지 않은 둘로 존재한다. 작가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 시선에 복수의 리듬을 접맥해, 그 모욕적 기표를 붕괴시킴과 함께 자유롭고 새로운 여성성의 조형화를 시도한다.

 

이렇듯, 박소은의 조각은 단일한 완결이 아닌 복수의 열림으로 자리한다. 사물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one dance〉의 경우 인체의 일부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짐승의 꼬리, 식물의 뿌리, 혹은 알 수 없는 생물의 내장처럼 보인다. 〈2 of Everything〉은 일상적 물건의 이중화와 특유의 신체적 촉감 및 컬러로 인해 사물과 신체의 감각을 같이 불러낸다. 이 혼종적 형상들은 명료한 경계를 파기하며, 그 사이에서 새로운 생명력의 획득을 시도한다. 그러나 박소은의 ‘괴물들’은 공포의 대상보다는 규범을 넘어서는 감각 주체로 다가온다. 그것은 사회가 배제한 타자적 여성, 억눌린 감정과 언어, 신체에 대한 소환과도 같다. 이제 소환된 괴물적 신체들은 경계를 넘어 뒤엉키고 끌어안는다.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가 『포스트 휴먼 The Posthuman』에서 말한 ‘되기-타자(becoming-other)’의 존재처럼3), 박소은의 신체들은 끊임없이 변형되며 스스로와 서로를 갱신하는 것이다. 만약 《겹과 결》의 조각들이 불편함을 일으킨다면, 그건 분류되지 않은 종에서 기인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전시장의 조각들은 단단한 구조를 흡수하며 부드러움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스러운 괴물들은 무너진 질서 위에서 자유로이 움직인다. 〈one dance〉가 몸의 중심이 붕괴된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춤이라면, 〈2 of Everything〉의 형상들은 서로의 호흡을 나누며 뒤엉키는 리듬이다. 하나의 몸이 다른 몸을 불러내고, 둘이 미끄러지며 접촉했을 때 만들어내는 그 기묘한 진동은 분리와 결합이 동시에 일어나는 포용적인 생의 일면을 보여준다. 박소은은 완전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의 지속, 단단함을 부식시키는 부드러움의 윤리를 제안한다. 그 윤리는 관계적 감각으로 변주되고, 몸은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계속해서 다시 쓰여진다. 그렇게 그녀의 조각은 서로의 숨이 스며들며 확장되는 몸, 스미는 몸이 된다.

 

 

 

  1. ) “분열증적 신체의 최초의 측면은 일종의 신체-여과기이다. [...] 신체 여과기, 조각난-신체, 그리고 분열된-신체가 분열증적 신체의 최초의 세 차원을 형성한다. [...] 승리는 모든 문자적, 음절적, 음성적 가치들이 오직 강세적일 뿐인 가치들로 대체되는 말-호흡들, 말-외침들의 수립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가치들에 분열증적 신체의 새로운 차원인 영광스러운 신체가, 즉 취입, 자극, 증발, 유체적 이동을 가지고 모든 것을 행하는 부분들 없는 유기체가 상응한다. [...] 분열증적 말의 이중성은 신체의 이중성-조각난 신체와 기관 없는 신체-과 관련해 전개된다.”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역, 한길사, 1999, pp.171-176

  2. ) 이리가레는 타자화된 여성성을 재정의하기 위해 이를 ‘두 입술(Two lips)’에 은유한다. 두 입술은 여성 성기의 형상을 의미하며, 이리가레는 여성의 자기 접촉은 언제나 포개져 있는 두 입술과 같이 다른 도구나 중재자 없이 스스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하나로 설명되는 남성의 남근과 달리 적어도 두 개이며, 개별적이지도 않다. 다시 말해 여성의 쾌는 외부의 것, 특히 남성의 개입 없이 스스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 쾌락의 과정에서 여성은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뤼스 이리가레, 『하나이지 않는 성』, 이은민 역, 동문선, 2000

  3. )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이경란 역, 아카넷, 2013, p.6

2024

운명의 해부학을 재구성하다 

이선영 미술평론가

박소은의 작품에는 차이가 차별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라는 타자의 목소리가 있다. 하트같이 심장을 닮은 형태는 두개가 겹쳐져 공유되는 자리를 만든다. 그렇게 겹쳐 만들어진 타원형은 그것을 연상시키는 기관을 통해 말을 이어간다. 타원형은 여성 성기와 유사하며 다른 각도에서 보면 눈이 되고 입도 된다. 귀를 두 개 붙인 형상도 복잡한 굴곡을 가진 대칭성 때문에 자궁이나 골반을 연상시킨다. 이 해부학적 기관들은 여러 방식으로 조합되어 보고 듣고 말한다. 블랙/핑크로 선택된 인조털은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기관들을 감싸고 이어준다. 유기체로서의 전체 몸은 복구되지 않는다. 그것들이 조화롭게 연결되기에는 이 여성 작가가 할 말은 너무 많다. ‘해부학을 운명’(프로이트)으로 만들었던 유기적 총체는 거부되고, 단편화된 기관은 재구성되려 한다. 완전한 해체는 죽음이고 무의미이기에 또 다른 연결은 중요한데, 몸 전체에 분포된 털은 적절한 맥락이 되어준다. 짝패처럼 연결된 손에 걸쳐있는 땋은 검은 머리는 털과 달리 끝없이 자라는 머리털, 특히 검정 직모로, 아시아 여성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말한다.

박소은은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자신의 작품이 ‘시끄럽고 난잡하고 말이 많기를’ 바라며, 여성의 ‘생명력과 공격성을 회복시키고 싶다’고 말한다. 검정 눈과 핑크 눈이 손잡고 있는 듯한 작품에서 핑크 쪽 눈의 분홍 털로 덮인 가장자리에는 긴 손톱이 눈썹처럼 박혀있는데, 타원형 모양이 여성의 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면, 그것은 다소간 공격적인 질(Vagina dentata)의 변형이다. 눈동자 부분은 거울처럼 보는 사람을 반사한다. 보고/보이는 관계 속에서 생겨난 사회적 권력으로, 특히 여성은 보여지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음을 말한다. 그것은 보여지는 여성이 사회의 지배적 시선을 다시 내면화하는 무한 반사의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성기는 양성의 육체적 차이를 극명하게 하는 기준이 되어, 한 성이 박해받는 입장이 되기도 하고, 이러한 박해에 저항하기 위한 대안의 자리가 되기도 한다. 수로요의 작업실에서 여성 성기 형상을 흙으로 빚고 있는 박소은을 만났을 때, 작가는 기계적 평등을 원하는 측은 아니었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남/녀를 비롯해서, 평등은 자유처럼 선험적 가치를 내장한 시점이 아니라 목표로 설정되어야 할 미지의 가치일 따름이다. 평등해서 평등해야 한다는 동어반복이 아니라, 불평등하기에 평등해야 한다. 여성의 입장이라는 것은 기울어진 운동장 또는 유리천장과 비교되는 여전한 질곡 속에서 유지되고 강화되어야 했다. 남성우월론자들이 있듯이 여성우월론자들도 있다. 작가는 이전에 주변화되었던 타자들을 중심에 놓고자 한다. 인간의 기관이 아닌 조개 형상들이 한가운데 품고 있는 보석(진주)는 이러한 주변/중심의 관계를 역전시키려는 운동에서 자궁의 위상을 강조한다. 진주는 상처가 승화된 것이며, 이러한 승화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지도 암시한다. 박소은의 작품에서 진주는 눈형상과 연결되어 눈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은 의식에 비해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여전히 남성중심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남성을 정상, 여성을 거세된 존재로 보는 입장이 대표적인데, 거세란 죽음 또는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말한다.

여성의 성기는 단단한 주체로 서 있는 남근과 달리, 벌어진 상처처럼 기괴한 괴물 형상의 원천이 되어왔다. 여성 성기라는 모델은 괴물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구축하기 위해 에너지를 발산하는 기관으로 나타난다. 특히 타원형 모양을 통해 눈이나 입으로도 전이되는 과정은 시각중심주의나 말중심주의(Logocentrism)를 변질시킨다. 눈은 의자같이 배치된 구조 속에서 엉덩이에 깔리고 자궁과 겹쳐질 수 있는 입은 순수가 아닌 오염의 원천이 된다. 작가는 여성을 포함한 인간이 태어나는 상징계 중의 하나인 문자를 연구하면서 그것이 온통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음을 깨닫고, ‘여자는 가공된 프로젝트’라고 결론 내린다. 여성의 자연스러운 몸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배적 가치는 남성의 미는 남성을 건강하게, 여성의 미는 여성을 약하게 하는 관행에서 발견된다. 상징계도 마찬가지다. 한자에서 ‘계집 여(女)’가 속한 글자들이 대개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편안할 안(安)’에서 여성의 그림자 노동이 아니라면 집은 결코 편안한 곳이 아닐 것이다. 로고센트리즘에 대한 비판은 말 대신에 쓰기에 대한 감각을 강조한다. 작가는 해체된 운명의 해부학적 기관들을 통해 여성을 다시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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